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토야마 이치로 (문단 편집) === [[자유민주당(일본)|자민당]] 시대를 열다 === [[파일:external/www.weblio.jp/souri52.jpg]] 12월 10일에 제5차 요시다 내각이 총사퇴하자 하토야마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처음 집권한 하토야마의 일본민주당은 7년을 장기집권한 자유당에 비해 세력이 약했다. 의석도 전체의 1/4 수준에 불과했고, 아직 거대정당으로 남아있던 자유당이 하토야마의 집권을 반길 리가 없었다. 1955년 2월,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 치러지면서 자유당 강세의 분위기는 급반전되었다. 이른바 '하토야마 붐'으로 불리는 이 선거에서 하토야마와 일본민주당은 드디어 1당으로 올라가는 데 성공하면서 하토야마 이치로는 처음 몇 개월 간 불안정했던 권력 구도를 안정적으로 굳히는 데 성공했지만, 역으로 좌우 양파로 분열되었던 [[일본사회당(1945년)|사회당]]이 중의원의 1/3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면서, 하토야마가 내세웠던 개헌, 즉 '''평화 헌법 개정'''[* 요시다 시게루는 전후 일본의 패전국 위치와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평화헌법을 앞장서서 주장했다. 그러자 국방비 부담 감소와 한국전쟁 특수가 맞물리면서 일본 경제는 그야말로 부활했고, 하토야마 내각 즈음에는 완전회복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되자, 일본 내 우익들 사이에 다시금 재무장에 대한 야욕이 싹트기 시작했는데, 하토야마는 이것을 간파하고 '''개헌을 공약으로 걸어서 일본 우익들의 지지율을 그야말로 쓸어 모았다.''']을 무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당 좌우파가 1955년 10월 화해하고 양파로 갈라진 사회당을 통합하면서 세력면에서 사회당이 일본민주당에 맞먹는 의석수를 획득하자, 일본 내 우익 정치가 및 재벌들 사이에서 사회당 재집권에 대한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고, 사회당이 자유당과 연합하면 충분히 집권할수 있기 때문에 불안한것은 마찬가지였다. 하토야마는 원내3당으로 전락한 자유당과 다시 접촉하기 시작해, 11월에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을 같은 정당으로 흡수해 이른바 '''통합 보수우익 정당'''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자유민주당(일본)|자유민주당]]'''이다. 사회당 좌우파와 일본민주당, 자유당이 서로 통합해 양당체제[* 사실상 양당제였지만, 규모상이나 조직력 상 '''자민당이 훨씬 우위'''였기 때문에 '''1.5정당 체제'''로 부르기도 한다.]로 정리된 1955년을 일컬어 '''[[55년 체제]]'''라고 부른다. 이쯤 되면 '''일본 내 보수우익 세력의 대부.''' 새로 생긴 자민당 내에서 하토야마는 미키 부키치, 오가타 다케토라, 오노 반보쿠 등과 함께 공동 임시 총재를 맡았으나, 경력이나 문벌이나 당내 세력으로 볼 때 하토야마를 넘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정당 통합 이후 임시 소집 기간 동안 세 번째로 총리 지명을 받아 첫 자민당 내각을 열었다. 이후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에 의해 자민당이 처음 실각할 때까지 '''무려 38년 간을 자민당에서만 총리가 나오는''' '''독주 체제'''를 형성했다.[* 사실 이건 1960년대 이후 다당화와 중선거제의 영향이 컸다.] 다만 막상 55년 체제가 시작된 직후에 치러진 첫 참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이 사실상의 개헌저지선을 확보하면서[* 자민당 61석 VS 사회당 49석] 부진을 면치못해 별로 좋은 성적표를 얻지는 못했다. 이 때 소선거구제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참의원에서 폐기되어 무산되었다.[[https://ja.wikipedia.org/wiki/%E3%83%8F%E3%83%88%E3%83%9E%E3%83%B3%E3%83%80%E3%83%BC|하토만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